성남FM 방송국 7년차 PD
장애인들과 희노애락 담아
내게 맞는 직업 찾아 행복
좋은 정보 전달하는데 집중

 

공중파 방송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마리텔(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1인 방송을 기획해 자기만의 콘텐츠로 다양한 방송을 한다. 이처럼 규모가 작은 소출력 지역 라디오 방송(FM주파수(88~108MHz)대역에서 작은 출력을 이용해 반경 5km안팎의 권역에 송출하는 저비용 지역밀착형 방송)에서는 1인 미디어 시스템으로 프로그램 기획부터 DJ, 시나리오, 음악선곡까지 총 연출을 다 한다. 전국 최초의 지역방송의 첫 전파를 탄 성남FM 방송국(대표 정용석)에서 편견없는 우리동네, 해피투게더 장애인 방송 프로그램의 PD로 활약하고 있는 뇌병변 장애인 최진희 PD를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 위치한 성남FM방송국에서 만나보았다.

 성남FM 방송국 소개 좀 부탁드린다.
-성남FM은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시범방송을 시작으로 2005년 8월에 정규 방송국으로 확정되었다. 현재 전국의 7개 공동체 방송국이 있다. 공도체 라디오 방송국은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활성화가 되어있으나 우리나라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지역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은 성남의 지역 주민들이 직접 방송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지역의 정보와 소식, 음악을 내보내는것이 큰 특징이다. 라디오DJ이의 꿈을 못 이루신 분, 전직 방송인, 예비 방송인, 지역문화발전에 앞장서고 싶은 분 등 라디오을 사랑하는 분들이 함께 각자 개성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지역방송의 매력인 것 같다. 6개월 이상 활동하게되면 방송경력확인서도 발급해줘 향후 방송인 및 언론매체 다양한 분야에 취업을 원하시는 분들이 많이 도전하신다.

PD로 근무한지 얼마나 되었나?
-2009년도에 4월 입사해 올해로 7년 째다. 2009년에 공동체라디오 방송국을 활성화시기키위한 목적으로 직원들을 많이 뽑았다. 장애인일자리창출의 목적으로 세명의 장애인을 뽑았는데 그중의 한명이 나다. 그 당시 장애인고용공단에 이력서를 많이 냈었는데 연락이 왔다. 성남FM방송국에서 직원을 뽑는데 면접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와 면접을 보고 취업이 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던거 같다.

오래 근무하신걸로 봐서 적성에 맞는 것 같다.
-저한테는 딱 맞다. 여기는 각자가 맡은 업무만 잘 하면 된다. 더군다나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고 잘 할때까지 기다려준다. 저도 조금씩 배워가면서 실력이 늘었다. 2009년 10월부터 프로그램을 하나 맡아서 라디오방송을 하게되었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나?
- 편견없는 우리동네, 해피투게더라는 장애인 방송 프로그램이다.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본방송되며 토요일 오후 6시, 일요일 오전 11시, 오후 6시 총 네 번의 방송이 나간다. 방송 내용은 장애인 재활과 취업정보, 성남시 관내에있는 장애인 관련 복지관 및 센터, 협회 소식과 장애인인식개선 캠페인등을 펼치고 있다.

 첫 전파를 탔을땐 느낌이 어땠나?
-첫 방송을 진행 하면서 너무 긴장되었다. 언어장애가 있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다. 동료들의 지지와 진행자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방송을 하다보니 욕심이 생겼다. 장애인들은 배움의 욕구가 많아서 생활영어 방송도 해보고 시사상식 코너도 만들어 방송을 했다. 여러가지 시도를 하면서 제가 PD, 작가, 엔지니어, 연출, 아나운서를 통틀어 하기에 이것이 공동체라디오의 특징으로 지휘자, 요리사 같은 역할을 한다. 또 저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표현해 내기 때문에 퍽 매력적이다. 방송을 하게되면서 현장 취재를 많이 해서 생생한 현장음을 들려주기 위해 발로 많이 뛰고 여러매체에서 정보도 취합해서 장애인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방송 관계자들이 제 방송을 들으면 제가 어떻게 방송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고 말씀하시더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겠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을때 더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그램 기획 시 주의 해야 할 점도 있나?
-공중파 방송이기 때문에 심의가 굉장히 중요하다. 간접광고는 당연히 안된다. 그리고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은 정치적인 이야기나 논평을 할 수 없다. 음악방송이나 지역정보를 전해야 한다. 저는 방송을 하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보통 A용지로 5~6장을 준비한다. 장애 관련 정보를 전하면서 내 사연을 많이 풀어내고 있다. 그래야 청취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것 같아서 내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방송을 하면서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나를 드러내는 것.... 나를 많이 드러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처음에 방송할 때 저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이 멘트를 안했다. 한번은 정용석 대표님께서 제 시나리오를 검토하시면서 “최PD, 자기 소개는 안하나? 청취자들은 이 방송이 무슨 방송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소개를 해야하다. 저는 장애인입니다.” 라고 대표님께서 장애인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프로이구나.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니 그 멘트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저는 방송에서 “네,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저는 뇌성마비 장애인 최진희입니다.” 라고 멘트를 했다. 내 자신이 장애인인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처음엔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또 그런 나 자신이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한해 두해 해를 거듭하면서 지금은 애교섞인 말투로 멘트를 날린다. “네 저는 장애인입니다. 언어장애가 있어 발음이 명확하지 않고 말을 더듬어요. 여러분 이해해 주시고요. 제 방송 끝까지 들어주세요.”

 결혼 이야기가 듣고 싶다.
-제가 아는 지인중에 소망재활원에서 자립해서 나오신 분이 계셨다. 하루는 그 집에 놀러갔다가 활동보조인으로 근무하고 있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지금의 남편이다. 이상하게 대화가 잘 통하고 편하고 그래서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갔다. 첫눈에 반한 건 아니고 자꾸 보다보니 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연애를 하고 2년 전에 결혼했다. 아이 계획은 있는데 아기가 생기지 않아 속상하다.

지금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시련도 많았을 것 같다.
-뇌병변 장애로 언어장애 때문에 어릴적부터 많이 힘들었다. 말을 않하면 비장애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말을 하면 얼굴도 일그러지고 말도 술술 나오지 않을때도 있고 버벅거릴때도 있어서 같은 반 친구들한테 왕따도 많이 당하였다. 나에게 학교는 지옥이었다. 부모님 속상할까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다녔다.(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일반 학교를 다녔는데 한번은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반에 저하고 몸이 불편한 친구가 두명 더 있었는데 저는 가만히 있는 편이었는데 누가 때리면 대꾸도 않하고 제가 피해다니고 그랬는게 그 친구는 대들었다. 그 순간 세네명이 그 친구에게 달려들어서 머리를 교실바닥에 쳐박고 발로 머리를 짓이는데 그걸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다. 제가 학교 못가겠다고...처음으로 엄마한테 말했다. 학교가 무섭다고. 그 전에는 놀림을 받아도 맞고 들어와도 부모님한테 아무런 내색을 안했다. 부모님이 알면 뭐하겠냐 속상하기 밖에 더하겠나. 그러다 그 날 처음으로 엄마에게 울면서 말한거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해줄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학교 생활을 견디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자존감이 밑바닥이었고 그때의 그 잔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나마 신랑을 만나서 조금 좋아진거지... 그리고 지금도 장애인단체니까 취재도 가고 그렇지 비장애인들이 속한 사회였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엄마 말씀이 인생은 순간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런 것 같다.

방송일을 하기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학교를 졸업하고 화성에 있는 비인가 장애인시설에 20살에 들어가서 13년 동안 근무를 했다.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집에도 자주 가지 못하고 매일같이 반복된 일상속에서 지내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되어 내 처지를 견딜수 있었다.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지만 시설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게 힘들었다. 그래서 33살에 시설에서 나왔다. 엄마에게 손을 벌릴 수 없기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취업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참 많이 냈다. 나는 지역 복지관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이력서를 낸 복지관에서 전화라도 와서 통화하게되면 제가 긴장하면 더 말이 버벅거리는데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장애인협회나 복지관에서도 서류전형 통과해도 몇마디 나눠보고 나면 거절을 하더라. 대게 보면 언어 때문에 ... 어쩌다 오라고 하는 데는 경상도나 전라도지역에서 오락도 하더라. 지난 13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서 살았는데 또 먼데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이 많았는데 우연찮게 방송국에 입사하게 되었고 비장애인들이 있는 사회 속으로 나가는 것이 정말 많이 두려웠는데 차츰 차츰 극복하게 되었기에 지금은 저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한다.

경기복지신문 독자분께 한 말씀
-34살 사회생활을 처음하니 편견에 가득한 시각에 내가 매몰돼 있더라. 평소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길거리에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할때 항상 책을 읽는데 ‘어머 장애인이 몸도 불편한데 책을 읽어.’ 하면서 지나가는 어르신께서 꼭 한 말씀 하신다. ‘몸도 불편한데’ 그 말씀이 가슴에 콕 박히게 말씀 하신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주눅들게 된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동정어린 말투에 상처받지 말았으면 한다. 설사 상처가 되더라도 잘 이겨내었으면 한다. 사회속에 나와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장애인들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활발히 활동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오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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