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끈 연결운동은 연중사업, 멘토 적극적으로 관리
31개 지부 결성, 회원 배가 운동 통해 내실 다질 터

 

염세완 경기도신체장애인복지회장이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새해 인사 부탁드린다.
=지난해는 메르스로 인해 행사도 개최하지 못한 게 많았는데 올해는 새로운 발전을 위해 우리 지부장님과 회원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새해가 되길 바란다.

-얼마 전 장애인계의 큰 별이었던 고 김광성 의원님께서 별세하셨는데 회장님께서도 많이 안타까울 것 같다.
=그렇다. 그분과의 특별한 인연보다도 종종 만나 말씀을 나누다보면 장애인을 위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이 서로 화합해서 함께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던 그 모습이 저의 마인드와 너무 같아서 대화가 잘 통했는데……. 우리 장애인계의 큰 인물을 잃은 것은 너무 안타깝고 그 전에나 앞으로도 그런 분이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신체장애인복지회의 특별한 사업이 있다면?
=매년 하계캠프를 크게 했었는데 재작년에는 세월호, 작년에는 메르스로인해 행사를 못했다. 올해는 아무 탈 없이 못 다한 행사를 해서 외출하기 힘든 장애인들을 위해 좋은 계획을 구상했으며, 변함없이 사랑의 끈 연결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칠 생각이다. 또한 경기도내에 26개 지부가 조성되어있는데 지금 지부장 선임기간이기도해서 나머지 5군데 시군도 지부장이 세워져 더 활발히 사업에 매진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부장을 선임할 때 중요시 하는 요건이 궁금하다.
=우리 지부는 비장애인도 지부장에 선임될 수 있기 때문에 타 단체보다 문이 넓은 편이다. 지역의 공헌도도 보고 인맥관계도 중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열정을 본다. 지역의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비장애인을 영입해 인식개선에 앞장서며 서로 어울리는 단체를 만드는 자세를 가졌는지 많이 본다.

-말씀하신 것처럼 비장애인도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어 장애인과 자연스럽게 하는 행사가 많은 것 같다.
=특히 사랑의 끈 연결운동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멘토는 비장애인이 많은 편이고, 멘티는 장애인학생으로 이 학생을 1년 이상 지속적으로 후원으로 물품으로 기타 만남으로 사회속의 일원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지닌 이 행사는 국회의원을 대회장으로 하고 있다.
지난 해 10월쯤 전국 사랑의 끈 연결운동을 할 때 1,700여명이 모였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전국에서 다 모여 함께 대회를 치르는 곳은 오직 우리 신체장애인복지회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의 끈 연결운동이야말로 년 중 365일 지속적으로 펼쳐진다고 봐야한다. 멘토와 멘티 협약식만 일 년에 한 번 하는 것이지 1년 내내 멘토가 멘티인 장애인학생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가. 지금 사례를 다 들 수는 없지만 학원비는 물론이고 재활치료비를 후원해주기도 하고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고 친구가 없던 장애학생에게 멘토의 자녀들이 친구가 되어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기도하며 여행을 가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미래의 꿈을 키워가기 때문에 이것은 그 아이가 평생 죽을 때까지 간직하지 않겠는가. 또 아이들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어떻게 뒷받침을 해주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미래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고 김광성 의원님 같은 분이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저는 이 사업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더 홍보하고 연중캠페인에 주력할 생각이다. 또 각 지부에서 멘토 멘티 관리를 인력부족으로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도지부에서 관리도 한다. 사랑의 끈 연결 운동 아닌가. 끊어지면 또 이어주기 위해서 끈이 있는 것이다.

회장님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저는 6남매 중에 둘째로 태어났는데 4살 때 추락 사고를 당해 척추를 다치면서 장애인이 되었다. 11살 무렵 다리 한쪽마저 못 쓰게 되어 차츰차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24살 때 오른쪽 다리에 무리가 와서 아예 걸을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다 어느 날 안수기도를 받고 기적같이 걸을 수 있게 되어 온 식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제 인생에 있어서 내가 장애인이 된 이유를 알게 되었고 또 바라보는 입장이었다면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6남매 중에 차라리 내가 장애인이 된 것이 더 감사했다. 그래서 부모님께도 약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저를 위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많이 가르쳐주셨는데 열쇠, 구두닦이, 도장을 만드는 등 수작업으로 하는 것에 재능이 있었던지 손수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손님과 불과 1미터의 간격을 두고 작업을 하면서 세상의 넓은 소식들을 많이 듣고 배우면서 저도 지혜가 생기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다보니 저는 항상 비장애인과 함께 운동하고 어울려 다니고 그랬다. 친구들과 경쟁해도 무엇 하나 지는 것 없이 똑같이 동등하게 해냈다. 그 뒤에는 항상 묵묵히 바라보시고 믿어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저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는 영원한 저의 스승이시다. 표현을 많이 하지는 않으셨지만 가끔 지나가시면서 저에게 하시던 그 묵직한 표현들이 지금의 제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제가 책임지고 있다. 큰형님이 계시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저를 믿어주는 우리 형제들에게도 감사하다.

자녀분은 어떻게 두셨나?
=딸 둘, 아들 하나다. 큰 딸은 결혼했고 우리 아이들과 저는 대화로 소통이 잘 된다. 저희부부가 맞벌이를 하다 보니 장녀가 고생을 많이 했고 우리 아이들은 큰 언니 말이면 제 말보다 더 잘 따른다. 저도 아버지한테 회초리를 맞아본 적이 없어서 아이들에게도 매를 들지 않았다.

신체장애인복지회와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막내 동생이 염세훈 과천지부장인데 과천지부를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부지부장으로 있으면서 도와주면서 제 일을 하고 있는데 5년 전 도지부에서 조직국장으로 와서 또 도와 달라고 해서 갔다가 지금까지 있게 되었다. 2014년 3월에 전 회장님께서 별안간 사표를 내시면서 공석이 된 자리에 제가 그동안 도지부 모든 사업개편과 여러 가지 조직을 관리해서 잘 아니 맡아 달라고 해서 갑작스레 하게 되었다. 그래서 2015년에 재임하게 되어 지금까지 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2014년도에 경장복하고 다툼이 있어서 김용석 회장님을 모시고 이한경 보건복지국장님을 찾아뵙고 신용식 중앙회장님을 찾아가 뵙고 우리 이제 그만 다투자고 해서 법정다툼이 해결되었다. 장애인단체를 제대로 알고 이끌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는 마인드는 타 단체와는 절대로 싸우지 말자. 그리고 우리 장애인들도 무언가를 줄 수 있다. 서로 포용하고 안아줄 수 있다. 이길 필요가 없다고 우리 회원들과 지부장들에게도 강조하고 강조한다.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할 때는 저도 똑같이 동등하게 하니까 별 다툼이 없었는데 장애인 단체에 들어오니 서로 장애유형이 다르고 장애정도가 다르니 다툼도 많고 시기질투도 많더라. 그러나 같이 싸우면 뭐하겠는가.

앞으로의 계획은?
=저는 항상 자기 전 하루일과를 되돌아보고 정리를 하는데 지난 17개월 동안 회장을 맡으면서 여기저기 외풍을 막기에 너무 바빴다. 이제 조금 정리가 많이 되어서 이제 각 시군지부를 더 보살피고 어려운 지부가 많은데 그 지부를 육성하고 회원 배가운동을 통해서 비장애인들이 더 관심 갖고 우리 장애인들과 더 어우러져 받기만 하는 협회가 아니라 서로 상생하는 협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독자 분께 한 말씀 부탁드린다.
=경기도신체장애인복지회에서 올해 세운 계획을 잘 마무리하고 저희 지부장님들과도 만족하는 한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사랑의 끈 연결운동에 더 관심을 가져주시고, 신문을 통해 더욱 성장하고 건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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