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와 함께 여는 소통의 시대 실천
호적없고 갈데 없는 장애인 가족 같이 대해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 도와

 

얼마전 이종채 경기도교통장애인협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협회의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명한나 평택시교통장애인협회장을 인터뷰해서 신문에 내보라고 했다. 중증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위해 봉사를 열심히하며 그 열정이 대단하다고 했다. 하루 빨리 만나보고 싶어 인터뷰 약속을 잡고 평택으로 차를 몰았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벽면 가득 감사패며 공로패, 복지유공 표창 등으로 꽉 차 있었다. 그간 명 회장이 얼마나 장애인의 권익향상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집무책상에 앉아있던 명 회장이 천천히 몸을 돌려 의자에서 일어나 워커에 기대어 책상 앞 소파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걸어왔다. “1994년 8월 28일 교통사고 인해 나흘만에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내가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어있었다...”며 명 회장은 회고하듯 운을 뗐다. 그 후 비장애인에서 중증장애인으로 모든 삶이 송두리째 변하며 걸어온 그의 삶을 들어보았다.

20년이 넘었지만 그 당시 상황을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1994년 8월 28일 교통사고로 인해 나흘만에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내가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어있었다. 밤에 덤프트럭이 달려와서 우리차를 박았다. 일종의 음주운전이었다. 며칠이 지난 다음에 경찰이 개입했고 우리차에 셋이 타고 있었는데 운전하던 전 남편과 지인이 죽고 나는 의식을 잃고 있다가 나흘만에 깨어났다. 경찰이 얘기하길 덤프트럭 운전자가 생계를 위해 낮에 일하고 야간에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다보니 보험도 안돼있고 아내도 환자고 애가 넷이고 처벌해봤자 나올게 없다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풀어주라 그랬다. 나는 다행히 전 남편이 보험에 가입을 해놔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참... 어린 두아이들 생각하니 전신마비가 되었어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 그래서 엄만가보다.

지금 워커를 사용하시는데 다행히 수술 후 경과가 좋았나보다.
-1년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수술을 여러차례 했다. 몸의 뼈가 6군데 골절이 되고 머리에도 뼛조각이 들어가있는걸 인공뼈로 몇 군데 교체했는데 그 당시에는 경추 수술을 못해서 6개월 동안 전신마비로 살았다. 그런데 사고 후 5년만인 1999년도에 평택의 신경외과 전문의 박진규 원장님이 경추 수술을 해주셔서 사고난 후 5년만에 수술을 하고 잘 돼서 워커 짚고라도 걸을 수 있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난 평생 누워지내야 했을 것이다. 그 후 국립재활병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재활치료를 받았다. 사고 당시 서울에서 장애인시설을 운영하고 있었고 어린아이 두 명을 키우고 있어서 재활 치료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평택으로 온 것인가?
-사고 후 1년 정도 있다가 병원에서 퇴원했는데 후유증이 오기 시작했다. 쉴 곳이 필요했다. 예전에 평택시 송탄의 한 목사님이 장애인들 13명을 데리고 사역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 생각이 나서 ‘목사님! 내가 송탄으로 내려가면 나갈 교회가 없는데 목사님 교회에 출석해도 되겠느냐’ 했더니 쌍수를 들고 목사님이 환영했다. 내려가보니 얻어먹어도 서울이 낫다고 지방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서울에서는 그전에 88올림픽도 개최하고 그런지 시설도 그렇고 장애인들의 교육과 인식의 변화도 오기 시작했지만 지방은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경험한 것들을 평택의 장애인인권에 앞장섰던 13명의 장애인과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1996년도에 가나안복지마을을 설립하고 사단법인 장애인권익지원협회도 운영하게 되었고 현재 교통장애인협회장도 맡게 되었다. 평택에 쉬러 온 것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지금의 남편은 어떻게 만났나?
-수원에 있는 학교에 공부를 하러갔는데 같은 수업을 듣고있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보니 예전에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 신문사의 편집국장의 자제분이더라. 내가 그 분을 참 존경했는데 그 분이 항상 저에게 하시던 말씀이 글 잘쓴다고 기자가 되는 게 아니다. 너는 기자보다 우리 아들 하고 붙여줄테니 같이 고아원이나 해라 그러셨다. 옛날에는 점심을 타 갖고 와서 먹는데 사무실에서 내려오면 서울역 주변에 거지들이 참 많았다. 불쌍해서 점심을 않먹고 빵을 잔뜩 사서 그 거지들과 나눠먹었다. 그 모습을 자주 보셨다. 그런데 그 아들과 이렇게 인연이 된 것이다. 부부라는게 한 곳을 바라고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전에는 부부가 다 그렇게 사나보다 했는데 지금은 신다가 벗어놓은 신발처럼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복지쪽에 늦게 출발해서 머리가 없다. 당신이 내 머리가 되 주면 내가 손발이 되어 주겠다.고 고백하는데 너무 멋있지 않은가. 어떻게보면 4,50년 산 사람보다 정이 더 들은 것 같다.

20년 동안 장애인들과 동거동락한 이야기도 해달라.
-평택에 내려와서 한국핸디캡라인이라는 장애인단체를 만들었다. 내려오자마다 여행 한번 못해본 장애인들 데리고 정동진 바닷가 3박 4일 캠프를 기획해 라이온스클럽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다녀왔다. 이 행사가 당시 획기적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여름캠프, 봄나들이 체험프로그램을 간다. 여기 시설 안에서는 동네 근처 분들과 함께 고기도 구워먹고 행사를 했다하면 동네 아줌마, 아저씨, 꼬마들까지 모두 함께 와서 노래도 부르고 간다. 이것이 장애인의 권익향상과 사회통합 실천이라는 생각한다. 또한, 저희는 모든 시설 운영비가 자비가 20%, 후원이 80%로 스스로가 능력 있게 그야말로 자립해서 운영해나가고 있다. 가나안복지마을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늘 문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시장갔다가 생각나서 하나 샀다며 수박도 놓고 가고 그러다보면 얼굴을 자주 보게되고 한 집 걸러 고민 없는 집이 어디있나...사무실에 스스럼없이 들어와서 함께 고민도 나눠주고 그러다보면 오히려 자신들이 위로를 받고 간다. 그리고 옛날에는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몇 년 못살고 죽을 목숨이라고 해서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 분들 부모님을 일일히 만나서 호적에 올려주고 한글을 가르치고 검정고시를 쳐서 컴퓨터 사다가 가르쳐서 자격증을 따도록 도와서 재활원에 취직도 시켰다. 사랑과 섬김이라는 자세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복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교통장애인협회장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나?
-현재 제 3대 회장으로 3년 전에 협회장을 맡게 되었다. 평택에 설립된 지는 꽤 되었는데 5년 동안 공백기간이 있었다. 내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어서 이종채 도 협회장님께서 평택시에도 교통장애인들이 많은데 그들의 권익향상을 위해서 일을 해달라고 권유를 많이 해주셨다. 그런데 그간 내가 해오고 있던 일도 있고 해서 선임을 망설이고 있던 찰나에 김락환 중앙회장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의 복지 철학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그동안 장애인복지일을 해오면서 생각하고 있던 그 정신이 나와 일치함을 느낀 순간 어느 타 단체와 무엇이 달라도 다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장애인들이 늘어나야할 사항이 아니고 줄어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 단체들은 장애인 회원을 유치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고 즉 늘린다는 것은 그만큼 장애인들이 계속 늘어나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장애인을 줄어야 하는 것이 맞다. 진짜 장애인을 위한 단체구나 하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국가보조금에만 의지하지 말고 자립구조를 스스로 갖춰 조직을 운영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희들의 복지 마인드와 같아서 더 뽕 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장애인이면 어떻게 살아가겠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게 중앙회장님의 그런 마인드에 아 저거다. 진짜 장애인을 위한 단체다. 그래서 현재 경기도교통장애인협회의 수석부회장도 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는?
-요즘에는 휠체어를 타고 가는 장애인에게 ‘교통사고시죠?’ 하고 한마디 건네면 ‘어, 어떻게 아셨어요?’하며 마음이 확 열리는 걸 느낀다. ‘보면 알아요’ 서로의 아픔이 밀물처럼 통한다. ‘그동안 무척 힘드셨죠? 이해해요’ 어느새 친구가 된다. 교통사고 장애인 주에는 후천적 장애인이 많은데 장애인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주력을 할 것이다.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마는 교통사고 예방을 하다보면 교통사고도 줄어들거고 그러면 장애인들도 줄어들지 않겠나. 또한, 교통장애인협회는 자체 사업이 많아 장애인단체가 자립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협회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상담이라던지 뺑소니추방 운동, 교통안전캠페인, 교통유자녀지원, 교통사고 예방체험교육, 반사지.번호판 시인성확보 및 지도자연수, 재활세미나 등을 활발히 개최할 생각이다. 또 장애인권익지원협회를 NGO단체로 가입해서 해외의 개발도상국에 몇 군데 선점을 해 놓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지으려고 한다. 예전에 중국에 요양원을 하나 크게 지어서 시도를 했었는데 중국은 정부에서 관리를 했는데 운영하던 중에 비리가 생겨서 폐쇄를 했다. 그런 아픔도 있었다. 그래서 현재 하고 있는 사업이 시설에 거주하며 나와 함께 생활해오며 나의 마인드를 읽을 줄 아는 장애인들에게 재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공부를 시키고 있다. 이 분들을 잘 키워서 인적자원까지 지원해 관리를 직접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경기복지신문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교통장애인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시스템을 다 잃어버린다. 그러나 먼저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을 해야한다. 나도 이렇게 앉아 있다가 밖에서 누가 찾으면 내가 벌떡 일어났다가 팍 자빠지니까.. 그만큼 받아들인다는 것이 세월이 걸리고. 먼저 장애인 이라는것을 인정해야한다. 그래야 현재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할 수 있다. 혼자는 어렵고 힘들지만 어렷이 함께 하면 서로 의지해 일어설 수 있다. 힘들땐 노크해 달라.

오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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