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 된 강의로 공감대 형성
론볼 국가대표로 활약,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서기도

 

15년만의 한파가 절정에 달한 지난 1월 21일 성남시 한마음복지관에서 장애인식개선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복현 씨를 만났다. 50대 초반의 나이로 예상했던 정 강사는 손주를 둔 환갑을 넘긴 할머니라는 믿기지 않은 외모와 매력적인 목소리로 누구에게나 친근감 있게 다가가는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론볼 국가대표로 활약하기도 한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요즘 학생들은 장애인식개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는데 어떤가?
=요즘은 인식개선이 잘 되어있어서 아이들이 의자를 먼저 치워주고 제 자리를 만들어준다.  장애인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장애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질문 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알려주면 강의가 끝나고 나면 아이들이 ‘선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어보고 도와준다. 아이들은 정말 금방 흡수한다. 빨리빨리 알아듣고 소통 한다. 저학년일수록 습득이 잘된다.

장애인식개선 강사는 어떻게 하게 되었나?
=신체장애인복지회에서 장애인식개선 강사 1기로 권민지 선생님과 함께 시작했는데 한 4년 정도 되었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는데 여기까지 오기에는 권민지 선생님과 이수탁 회장님의 도움이 컸다. 제가 나이가 많다. 52년생이다. 그래서 나이도 많고 잘 못한다고 했을 때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이끌어주셨다. 이 자리를 통해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노하우가 있을 것 같다.
=저는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만들거나 우리나라 장애 역사나 흐름 등 지식적으로 몇 년도에 어떤 법이 제정되었는지 외우는 것을 잘 못한다. 그래서 저의 경험과 연결해서 강의를 할 때가 많다. 여자중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동영상을 재생하려다 잘 안돼서 ‘선생님 첫사랑 얘기 좀 해줄까?’하면 상당히 좋아한다. 장애로 인해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 등을 해주면 장애인들도 평범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구나라고 받아들인다. 여고생들에게는 출산하면서 아이 키우는 일등 얘기해주면 집중을 잘하고 공감대도 빨리 형성된다.

인권침해를 직접적으로 받은 적이 있는가?
=많이 나아졌지만 외출을 하면 하루에 한번은 받는다. 지나가다 가게에서 물건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벌써 주인들 눈매가 싸늘하면서 인상이 싹 달라진다. 보통은 직접 운전을 하는데 얼마 전 지하철을 이용해 장애인 모임에 간적이 있다. 태평역에서 내렸는데 휠체어리프트가 고장이 나서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역무실에 가서 리프트가 고장이 났는데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귀찮다는 듯이 고칠 거라고 하면서 투덜대더라. 그래서 제가 지금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어떡하냐고 그럼 저를 업고 올라가고 전동휠체어는 들어 올리라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바쁘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기에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당당한 내 권리를 찾고 싶었고,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들어 올리라고 요구해서 결국은 나를 업고 올라가고 지나가던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역무원들이 같이 전동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그들도 힘들어 봐야한다. 내 고통을 당해봐야 장애인의 어려움을 알게 되고 그래야 편의시설을 제대로 갖출 것 아닌가. 결국 내 뒤에 오는 장애인들은 리프트를 타고 편하게 왔다고 하더라. 사회가 장애인을 만들지 않으면 장애인은 없다.

론볼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너무 앉아만 있으니까 당뇨와 혈압이 와서 고생을 하고 있던 때에 운동을 하라고 해서 대중화되지 않은 론볼을 했다. 론볼을 하면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나갔다. 일본도 자주 가고 전국체전을 13번 출전해서 메달도 많이 땄다. 51회 전국체전 때 성화 봉송을 했는데 제 일생일대의 가장 뜻 깊은 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 후 론볼 심판자격증도 따고 재미있고 열심히 했다. 지금은 론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전화도 가끔 온다. 한창 열심히 하던 2000년 초반 론볼경기도연맹단체가 없어서 지인들 몇 분하고 안양에 계신 분들과 경기도연맹을 만들어서 안양운동장에 그 사무실을 만들어서 그곳을 많이 갔다. 그 외 수영과 볼링도하고 한번 하고자 하면 하는 성격이라 해보니 해볼 만하고 재미있더라.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하신 것 같다.
=좀 그렇다. 흑백논리 주의자라 육하원칙에 의해서 말을 하고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지어야겠다라는 생각까지 하고 말을 한다. 실수하고 첫마디만 꺼내고 그러질 못한다. 저는 불가능이 없다고 늘 생각한다. 비가 온다. 눈이 온다. 추워서 장애인은 못해. 제 사전에 그런 말은 없다. ‘못해’ 그러면 못하지만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에 감기를 앓았는데 좀 힘이 드나 하면서 집에 있었는데 무력함을 이기려고 가방도 만들고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인터뷰 요청이 와서 아직 내가 살아있구나 하면서 원초적 힘이 생기면서 오늘도 나오게 되었다. 또 저는 누구한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다. 활동보조인이 와도 이불터는거 높은데 위에 있는 물건 내려주거나 걸어놓은 빨래 걷는 일 외에는 도움을 받지 않는다.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쯤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장애인이 학교를 다닌다? 편의시설과 권리가 어디 있나? 놀림도 많이 받았다. 친정이 종로에서 좀 잘 살았다. 그때는 도우미언니 두 명이 학교 갈 때와 올 때 업고 가는데 제가 무거 우니까 가다가 내려놓고 한참을 쉬고 있으면 저는 마음이 급해진다. 어렸을 때도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학교에 지각할까봐 ‘언니 빨리 가자’그러면 때리고 꼬집고 그랬다. 좀 심술 졌다. 제가 아프니까 울면 지나가던 친구들이 저를 그렇게 놀리고 체육시간에도 함께 어울리지 못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친구들이 저를 놀리고 그랬던 것이 그 친구들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생각되어지더라. 내가 함께 놀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고 업혀서 오고 하니까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애들 노는 시간에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엄마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사나 해서 양재를 배웠다. 종로 중심지에서 20살 때 양장점을 차려서 운영을 했다. 지금도 맞춤옷이 비싸지만 그 당시도 그랬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었다. 26살 먹은 언니들을 데리고 가르치면서 일을 하려니까 내가 어리다고 얕보면 안되니까 나이를 많은 것처럼 속여서 일을 했다. 비장애인 남편과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열심히 살았다.

결혼을 일찍 하신 것 같다.
=21살 때 결혼을 했는데 그때 당시 남성장애인들은 결혼을 해도 여성장애인들이 결혼을 한다? 엄두도 못 낼 시대였다. 그런데 저는 사촌오빠 친구였는데 혈서까지 쓰면서 저와 결혼하겠다고 해서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혼 했는데 친정엄마가 반대를 많이 하셨다. 그래서 결혼하고 정말 힘들었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어린 시절 어려움 없이 크다가 결혼하면서 가난해지고 힘들었고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힘들었다. 부모님께서 반대하시는 결혼을 하면서 일체 도와주지 않아서 고생을 좀 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자 아이를 돌보는 것이 무척 힘드셨을 것 같다.
=갓 태어난 아기는 또 얼마나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가... 하반신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 얼마나 키웠겠는가... 아이들이 미쳐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했을 때 가져다주지 못한 일, 뻔히 다칠 것을 알면서도 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한두 살 아기가 알아듣나?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철철 흘리는데 어쩌지 못하고 저하고 둘이 피범벅이 돼서 아빠가 올 때까지 닦지도 못하고 그러고 있었으니... 그때 상처가 아직도 있다. 그 아이들이 이제는 커서 결혼도 하고 손주들이 벌써 다섯 명이다. 정말 친정엄마가 기저귀한번 빨아주지도 않으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엄마가 내 곁에 계셨었나 싶더라. 그러고 나니까 ‘아.. 엄마가 이런 때를 대비해서 미리 나를 훈련시키셨구나’ 생각하니 지금에 와서는 너무 죄송하고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후회스럽다.

경기복지신문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얼마 전에 경기복지신문 사설에서 장애는 차별이 아닌 차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저는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못한다는 생각보다 할 수 있어. 해보자 하는 정신력으로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힘들었지만 제 인생에 있어서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었다. 독자 여러분들도 올해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당당히 살길 바란다.

저작권자 © 경기복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