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인권을 바로 세우도록 노력할 것

신망애 복지재단 설립해 장애인 공동체 30년 간 이끌어
장애인 분야 경험 살려 전문성 가지고 인권위 활동할 터 



 

-장애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지난 9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 인권위원으로 김양원 목사가 임명되었다. 신망애 복지재단 설립자로 더욱 잘 알려진 김양원 인권위원을 만나 그간의 장애인분야의 활동과 앞으로 인권위원으로서의 포부에 대해 들어 보았다. <편집자> 


-인권위원으로 임명받으신 소감을 말씀해 달라.
=대통령께서 임명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소신 것 일해 우리나라의 인권을 똑바로 세워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겠다. 또한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장애인 복지와 인권을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해 왔는데 일 한 보람이 없었다.


사회에서 알아주지도 않고 한 두 사람 외쳐봐야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장애인이나 장애인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힘을 가져야 장애인 복지나 인권도 향상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미력하지만 장애인복지와 인권이 향상될 수 있는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 


-인권위원으로서 하는 일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린다.
=인권위원회는 위원장을 비롯해 상임위원 3명, 비상임위원 7명 등 총 11명의 전원위원회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전체 법안에 대한 결과를 전원위원회에서 내리게 되는데 상임위원 3명은 상근하고 겸직할 수 없으나 비상임위원은 다른 일을 하면서 인권위원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상임위원이나 비상임위원 모두 자료나 안건을 같이 연구하고 일한다. 일의 양이 굉장히 많다. 5년 동안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건수가 3만 건이 넘는데 이는 연간 5천 건이 넘는 숫자다. 이 엄청난 진정건수를 모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자료도 검토하고 직접 몸으로 뛰면서 매진하고 싶다.


-인권위원 임명에 대해 일부 인권 단체들이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단체들이 반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지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공천시청을 한 것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 인사의 국가인권위원 임명이 인권위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장애인 분야에서 오래 일하면서 늘 힘을 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느꼈고, 국회에 진출해 실질적 힘을 가지고 일을 하고 싶어 공천 신청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인권단체들은 인권위가 정부의 하수조직이 되지 않을까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만 현재 인권위원은 대통령 4명, 국회 4명, 대법원장이 3명을 임명하는데 내가 이명박 대통령 지명 1호다. 대통령이 전혀 모르는 사람을 그러한 막중한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충분한 검증을 거쳐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었다고 들었다. 또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지만 소신껏 일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인권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일할 것이다.


두 번째는 국가인권위가 사회복지시설의 비리나 인권유린을 감시해야 할 기구인데, 이러한 사회복지시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의 비리와 인권유린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하지만 오히려 장애인이 인권위에 있기 때문에 장애인분야를 위해서 일을 할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애인 계에서는 환영을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장애인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자기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망애에서는 초창기 시절부터 장애인들이 일을 했다. 장애인들이 일을 하고 수익도 직접 관리하고 분배하도록 했다. 또한 일을 못하는 장애인들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했다.


요즘은 사회복지기관의 프로포절이 많이 보편화되었지만 이를 처음 도입한 것은 신망애 복지재단이다. 전체 입소 장애인을 그룹화 해서 등산할 사람, 수영할 사람 등 프로그램별로 구분을 해서 참여하도록 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당시 최덕구 경기도의회 보사환경위원장을 만나 프로그램 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도내 20개 시설에 도비와 시비 각각 1천만 원씩 총 2천만 원씩 지원한 것이다. 3년 뒤에는  보건복지부에서도 이러한 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각 기업들도 참여했다. 시설장이기 전에 나 자신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시설 운영에 있어 재활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시설을 설립해 운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분야에 있어 전문성을 가지고 인권위에서 일할 수 있다고 본다


-장애인 분야에 많은 업적을 이루어 오셨는데 처음 인연을 맺은 계기에 대해 말씀해 달라.
=7남매 가운데 외동아들이다 보니 집에서 귀하게 컸으나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면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하나뿐인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머니께서는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노력을 하셨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막내 여동생을 낳았는데 여동생은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동네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는 등 설움이 많았고 가정형편도 넉넉지 못해 중학교도 못 갈 처지였으나 가출을 하고 돈을 벌면서 중학교를 다녔다.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려고 원서를 내러 갔는데 장애인은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없다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원서를 찢어버렸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던 그 시기에 한 장애인을 만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다.


손과 발을 쓸 수 없어 간신히 기어서 이동하던 한 장애인이 도와달라고 하기에 대화를 해보니 먼 길을 가야하는데 기어가야 한다고 하더라. 무심결에 차를 타고 가라고 했는데 그 장애인이 성질을 내면서 차를 탈 돈도 없고, 차에 태워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주려 했으나 택시들이 서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택시 3대를 그렇게 보내고 4대 째 택시가 서자 그냥 가버리면 승차거부로 신고하겠다고 했더니 신문지를 좌석에 깔고 나서야 그 장애인을 태우는 것이었다. 그 분을 태워서 보내고 뒤돌아서는데 가슴에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세상적으로는 깨달음이 생겼다고 할까. 나보다 더 힘들고 사회에서 천대 받는 사람들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때부터 마음의 방황을 접고 본격적으로 장애인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30년 전이면 장애인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때인데 힘든 일도 많이 겪었을 것 같다.
=장애인 공동체를 시작할 때가 1981년이었다. 한창 나라가 어수선할 때이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전무해 장애인이라고 하지 않고 불구자라고 했다. 그 때만해도 장애인 2명이 모여 있으면 사람들이 무섭다고 도망갔다.


공동체를 시작하면서 5년 동안 13번이나 장소를 옮겨 다녔다. 세를 얻어 이사를 가면 주민들이 나가라고 해서 옮겨야만 했다. 그래도 어려운 가운데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1986년도에 청량리에 복지센터를 건립하려고 90여 평의 공간과 건축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기도 전에 주민들이 와서 반대를 하더라. 시위를 하면서 복지센터 공사를 못하게 막는데 결국 중단이 되었다. 그래서 이에 맞서 80명의 공동체 식구들도 시위를 시작했다. 이 사건이 뉴스에 방송이 되면서 18개의 장애인 단체가 시위에 동참했고 처음으로 전국규모의 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한 달 동안 청량리 동사무소를 점거했는데 그 자체가 투쟁이었다.


그러나 동사무소 점거로도 해결이 안돼서 동대문구청장실, 서울시장실, 복지부 장관실 등도  점거하며 복지센터 건립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결국엔 국가에 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서는 협상안으로 현재 신망애 재단이 있는 이 곳 부지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고민 끝에 공동체 가족들이 먹고 살아야 하기에 할 수 없이 여기로 오게 된 것이다.


이후 공동체를 이끌며 은둔하다시피 살았는데 다시 장애인 문제로 일어난 것이 청와대 사건이다. 장애인시설의 원장 250명이 청와대에 초청된 적이 있는데 당시 보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목발사용이나 휠체어 사용자로 분류가 안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교통사고가 나서 휠체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휠체어 사용자 명단에 없다는 이유로 못 들어가게 막더라.


끈질길 요구 끝에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전경 4명이 내 휠체어를 들어 올리면서 보조가 안 맞아 넘어지는 바람에 손을 다치게 되었다. 피가 흥건히 고인 손을 치료하지 않고 오찬 장소에 도착해 대통령 앞에서 손바닥을 내보이며 경직된 행정과 미비한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해 지적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건 때문에 청와대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들어섰다고 하더라. 


-장애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목회자로 사회복지사로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장애인 복지 발전을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많이 해 왔다. 이번에 맡게 된 인권위원도 소외된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목회자나 사회복지사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회자나 사회복지사는 힘이 없는데 반해 인권위원은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이러한 힘을 가지고 어렵고 힘든 상황속에서 눈물 흘리는 분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무엇보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애인 분야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가슴으로 여러분들을 위로하고 여러분을 위해 전진할 것이다. 


정리=오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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