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11.13 수 09:17
> 뉴스 > 인터뷰
     
김임연 아시아장애인올림픽위원회 선수대표
아시아장애인 선수들의 목소리 대변에 힘쓸 것
2011년 01월 10일 (월) 경기복지신문 gwnp@naver.com

압도적 지지로 2회 연속 APC 장애인 선수대표로 선출 돼
실업팀에서 비장애인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실력 키워와

   

<사진제공=대한장애인체육회>

지난달 17일 오전 IPC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는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사격 대표팀의 김임연이 APC 아시아장애인올림픽위원회 선수대표 선거에서 당선됐다’고 밝혔다.

2010 광저우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참가 선수 전원을 대상으로 치러진 이번 선거에는 총 3명의 선수가 입후보했는데, 김임연 선수가 67.3%를 얻었고, 이어 베이징장애인올림픽 역도 동메달리스트인 무타즈알 주에이디(요르단) 선수가 25.6%, 장애인올림픽 공기소통 4관왕인 모하매드 레자(이란) 선수가 7.1%를 얻었다.

김임연 선수(43. KB국민은행)는 지난 2006년 말레이시아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 당시 위원장에 당선돼 4년 임기를 마친 뒤 재선에 성공하며 2014년까지 아시아 장애인 선수를 대표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된다.

김임연 선수는 “메달을 못 딴 대회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APC 선수위원장으로 당선돼 금메달을 딴 것만큼 기쁘다”며 “앞으로 많은 장애인 선수들의 대변자로서 앞에 나가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해결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커피와 음악을 좋아하며 소녀 같이 여린 외모지만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하고 싶은 일은 꼭 해내는 강단 있는 그녀, 김임연 선수를 만났다.

-2006년 아시안게임에 이어 2010년에도 APC(아시아장애인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장으로 당선됐다.

=4년 전에 처음 APC 선거에 나갔을 때는 어떤 정보도 없었고 그동안 활동했던 선수들에 대한 이력도 없다보니까 선거에 나가는 것이 무모한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도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었다. 그 때는 누구나가 다 안 된다고 했는데도 당선이 되어서 굉장히 기뻤었는데, 이번에는 또 ‘한번 해봤기 때문에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선거에 집중을 더 많이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합 날짜와 선거 일이 같아서 경기하러 가면서도 한명이라도 표를 더 잡아야한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경기는 경기이고, 선거는 선거이기 때문에 경기할 때는 경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표 차이가 많이 나면서 재선이 될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당선이 되어서 정말 기쁘고 2011년부터 계획을 세우고 아시아 선수들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APC 선수위원장으로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 건가.

=집행위원이기 때문에 국제회의나 2014년 인천아시아게임도 몇 분의 위원들과 함께 우리나라로 유치해왔고, 앞으로 있을 제1회 동계아시안게임도 우리나라가 유치 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이런 국제행사부터 소규모 지역행사까지 아시아조직위원회에서 승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때 승인할 수 있는 역할, 그리고 아시아 선수를 위해 전체 통합을 시키는 역할도 한다.

또 저개발 국가나 여성장애인들, 현재 스포츠를 하고 있는 장애인이나 하려고 생각중인 많은 장애인들을 끌어내서 귀속시킬 수 있는 역할까지 선수위원장의 활동범위가 넓다.

-선거일이 시합날짜와 겹쳤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다.

=그전에는 각 나라 대표가 1명씩 나와서 투표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IPC 규정에 의해서 한 선수가 1번의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3500명의 표가 있었다.

그 사람들을 다 표로 끌어내기가 쉬운 일도 아닌데다가 지난번 선거보다 이번 선거는 장소부터 일정까지 악조건이었다. 우리는 광저우가 여름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선거하는 날에는 바람도 거세게 불고 우리나라 겨울보다도 더 추운 날이어서 투표율이 떨어질까 봐 고민이 많이 됐다. 선거기간이 3일밖에 되지 않았고 지역도 규제가 되었고 배포하는 전단지도 승인받은 것이 아니면 안 되는 등 까다로웠다.

그래도 3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 9시까지 식당 근처나 선수촌 입구 근처에서 최대한 한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주로 악수를 하면서 나를 소개했고, 현 위원장이면서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하니 투표해달라고 호소를 많이 했다. 처음에는 나를 잘 모르다가 다음날 만나고 그 다음날 또 만나고 하니까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선수들이 선수위원회에 대해 알고 또 김임연이라는 선수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던 것 같다.

시합일이었기 때문에 경기가 끝나자마자 선수촌으로 돌아와서 4시간 넘게 투표를 위한 선거운동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상황도 그렇고, 장애인아시아게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 3위라는 좋은 결과를 냈다.

=중국이 강세인 종목이 우리나라와 많이 겹치기 때문에 이번 아시안게임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등급심사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제 등급을 못 받아 경기 시작부터가 어려웠고 또 중간에 육상 메달리스트 홍성만 선수한테도 등급을 상향 조정해서 자격을 박탈하는 일이 생겼을 정도로 우리나라가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란과 우리나라가 메달 수가 같아서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데 결국 우리가 3위가 되어서 기쁘다.

-지금 실업팀에 소속되어 있는데, 개인훈련과 APC 일도 하려면 바쁘겠다.

=KB국민은행 소속으로 17년째 일반 선수 중에서 혼자 장애인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훈련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태릉 사격장에서 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춥고 힘든 날에는 다리에 통증이 오니까 장애를 가진 선수들은 그 시간을 다 맞춰서 하루 종일 훈련을 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출근해서 훈련을 하고 있다. 또 아시아선수위원장 외에도 KPC (한국장애인올림픽위원회) 부회장과 우리나라 선수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훈련 외 시간에는 업무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작년까지는 한국체육대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기 때문에 더 바빴다. 새벽에 잠도 못자고 레포트 쓰고 그랬는데 너무 지치다보니까 올해는 공부하는 것을 좀 쉬자고 생각해서 박사 과정도 미뤘다.

선수위원장이지만 아직 나를 서포터해줄만한 지원단이 없기 때문에 회의나 공문이나 앞으로의 계획, 이런 것들을 다 스스로 만들어야 해서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일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다보면 벅찰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나 혼자서 다 해왔지만 이제는 체육회나 문광부에서 외교적으로 선수를 대표해서 일을 하는 위원회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 교류 관계에 있어서 메일도 주고 받아야하고 국제행사에도 참여해야하니까 통역 지원이나 사무실도 있어야 한다. 지난 4년 동안 체육회에서 기본적으로 나오는 것 외에는 거의 내가 비용을 부담해왔다.

그런 것들을 선수들이 다 보고 주변에서도 많이 아니까 다른 선수들은 하고 싶어도 도전할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또 지원이 없다 보니까 아시아 각국에서 치러지는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보니 선수들과 접할 기회도 많지 않아서 장애인선수들에게 어떤 것을 전달해야할지, 또 그들을 위해서 내가 어떤 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지 미약한 부분들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저개발 국가와 연계해서 서포터 단을 만들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 일부 사용된 종목의 기구들도 그 나라 선수들에게는 새장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서 역할도 하고 싶은데 지원이 없다보니 역시 한계가 있었다.

우리도 7~80년대에는 그들처럼 어려웠지만 2000년 넘으면서 일본과 동등한 선수대접을 받기까지 선배 선수들의 외침이 없었다면 알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처럼 그런 계기가 필요한 것 같다.

   

<사진제공=대한장애인체육회>
▲김임연 선수의 경기모습

-운동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태어날 때는 건강했었는데, 4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부모님은 병원을 오고가면서 앉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는데도 수영장을 다니게 했다.

수영이 재활에 가장 좋다고 하니까 수영을 하면서 몸이 건강해지고 다리 근육도 좀 생기고 그래서 짚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소아마비라 예쁜 몸은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고 수영을 한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래도 나아진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 많은 시선들은 다 무시하고 수영을 하면서 운동에 대한 효과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운동을 접하게 되었고, 운동으로 장애를 남들보다 빨리 극복해서 사회생활에서도 빨리 적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격과의 인연이 맺어지게 된 계기는.

=사격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하게 되었다. 그때 총이 내 키만 하고 무거워서 들 수도 없을 정도였는데, 매일 총통 들고 다니면서 엎어지고 무릎도 까지고 그랬다.

농구, 수영 등 여러 가지 운동을 해봤지만 남들이 쉽게 하지 않는 종목이고 또 개인 종목이다 보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장애인올림픽 선수가 없었는데 스스로  몸은 불편하지만 열심히 해서 일반 올림픽 나가서 메달을 따야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다가 84년 LA 올림픽부터 장애인올림픽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장애인종목에 장애인 선수로서 육성되었다.

-실업팀에서 활동하는 장애인 선수가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실업팀에 들어가게 되었나.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굉장히 몸이 안 좋았다.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를 따면서 그 이야기가 뉴스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 (구)주택은행 신명호 행장님께서 우연히 뉴스를 접하면서 사격부가 있으니까 몸은 불편하지만 같이 합류해서 훈련하면 좋은 선수로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다음날 바로 발령을 내리셨다고 한다.

영광스러웠지만 처음에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다른 장애인 선수들에게도 기회가 없을 것이고 나도 마찬가지니까 1-2달 뒤에 사표를 내더라도 가보자라는 생각에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올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격팀에서 기술을 익히면서 더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 선수들과 섞어서 운동하면 어려운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

=장애인이지만 일반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운동을 한다. 그 선수들도 최종 목표가 올림픽에 출전해서 메달을 따는 것이니까 목표가 같고 또 근무시간만큼 늘 운동을 한다. 매일 4시까지 본 사격을 하는데 그 시간이 아무리 힘들어도 몇 년 동안 맏언니 역할도 해오면서 훈련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

-장애인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 부모님께서는 꼴찌를 하는 한이 있어도 일반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과 어울리라고 하셨다. 부모님이 평생을 책임져 줄 수 없기에 나중에 혼자 생활할 수 없으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렇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요즘 이야기하는 왕따 아닌 왕따도 당하고 다리병신, 전염병 환자라고 놀림도 많이 당하면서 많이 울고 많이 힘들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우울해 하기보다 밝은 표정으로 친구들을 대했던 것이 통해서 나중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끝나면 나를 기다려주고 같이 집에 가서 놀다가 밥 먹고 가는 친구들이 고정적으로 생길 정도로 친구가 많이 생겼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여니까 주변에서 다가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학교 다닐 때 눈물이 날 정도로 안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사회 생활하는 데에도 문제없고, 오히려 장애가 없어도 환경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내가 겪은 그런 이야기도 당당하게 해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도 지금 4살짜리 아이가 있지만 장애를 갖고 있든 없든 부모님들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아이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면 좋겠고 스포츠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아이 혼자 두지 말고 엄마가 늘 아기 옆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어릴 적부터 키워주면 좋을 것 같다.

-결혼한지는 얼마나 되었나.

=결혼한지는 이제 5-6년 정도 됐다. 남편은 나에게 있어 늘 든든한 존재이고 많이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지금 아이가 엄마를 한창 찾을 시기라 같이 놀자고 회사가지 말라고 할 때 마음이 아프다. 늘 가족들이 옆에 있기 때문에 힘이 되고 우리 아들에게도 또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욕심만 가지고는 못사는 거니까 이제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위해서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사실 고민도 많이 하고 있다.

   
▲김임연 선수가 직접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곳이 직접 운영하는 커피숍이라고 들었는데.

=어떨 때는 물보다 커피 마시는 양이 더 많을 정도로 커피를 정말 좋아한다. 커피숍을 꼭 운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동생이 도와주어 시작하게 되었다. 가게를 시작한지 3개월 정도 되었는데 이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운동도 그렇고 커피숍도 그렇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여기 오는 손님들이 커피도 즐기고 편안하게 쉬었다가 갈 수 있는 분위기를 내보려고 노력중이다.

-올해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IPC와 APC의 우수한 선수들을 초청해서 워크숍을 개최하고 싶다. 우리나라 장애인선수위원회를 통해 우리나라 스포츠가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유럽, 아시아 등 각 나라 선수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다른 일을 위해서 은퇴를 고려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는데, 2012년 런던 올림픽도 선수로서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은퇴를 할 것인지 그 이전에 그만둘 것인지 시기상으로 많은 생각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경기복지신문 가족들에게 새해인사 한 말씀 부탁드린다.

=2010년에는 아프고 힘든 일이 많았었다. 아시아게임에 출전 한 달 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국가대표 기간 동안 많이 아프고 힘들었었다.

그래서 메달도 꼭 따서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메달도 못 따고. 그것뿐만 아니라 유난히 힘겹고 시련이 많은 해였는데 올해는 정말 밝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고, 또 작더라도 행복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지금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움츠려있지 말고 그럴수록 다른 방향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고, 포기하지 않는 삶, 내 자신을 사랑하고 나를 바꿔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많은 장애인 식구들이 자신의 소중함을 알고 자신을 사랑하고 화분에 예쁘게 꽃이 피면 다들 한 번씩 만져보듯이 자신을 예쁘게 가꿔갈 수 있는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지혜 기자

경기복지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 경기복지신문(http://www.ggwelfar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소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양현로 411, 702호|TEL : 032-656-6770|FAX : 032-656-6772
등록번호 : 경기다00785  |  등록일 : 2004년 3월 5일 |  발행인: 안선숙  |  편집인 : 오혜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선숙
Copyright 2009 경기복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gwelfare@naver.com
경기복지신문 사이트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무단전재·복사·배포 등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