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째 장애인 가정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해
한라주공 1차 아파트 입주자 대표로 봉사하기도
부업할 공간 마련해 장애인들에 소일거리 주고파

“개천에서 용난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사람이 나왔을 때 종종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제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을 쓰기가 어렵다.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교육조차 돈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집안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환경이 좋은 아이들을 따라가기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12년 째 장학금 지급 사업을 해오고 있는 이재희 부천시장애인자녀장학회장을 만나 그동안의 활동과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장학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달라.
=수급자 자녀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돈을 벌도록 법이 만들어져 있다.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안전한 직장을 잡아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을 때 수급자 탈락을 해야하는데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탈락이 되니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다. 요즘같은 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직장을 잡기도 어렵지 않으가. 또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 같은 경우는 공부를 하고 싶어하면 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 마을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여건상 아이들 공부방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부모로서 미안한 부분이 그것이다. 학원도 못 보내주고 공부방도 못 만들어 주는데 혼자서라도 대학을 가겠다고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될 수 있도록 12년 전 부터 장학금 지급을 해오고 있다.


대학교를 들어가도 장학금을 못 받으면 누군가는 학비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학비를 지원할 정도는 안 되지만 책값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지인들과 모아서 장학금을 주고 있다. 현재 장학금을 받은 학생 가운데 20명 정도는 대학을 졸업해 사회에 잘 적응해 생활하고 있다.

▲ 장학금 수여식 행사에 참석한 홍건표 부천시장과 함께 촬영한 단체사진

-보람을 많이 느끼시겠다.
=아이들이 사회에서 자리잡은 모습을 볼 때 기분이 좋다.
내가 가진 것은 없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해왔다. 이 일은 중독성이 있다. 못하면 미칠 것 같고, 하면 좋고, 또 하고 나면 신체적으로는 힘들지만 보람을 많이 느낀다.


-장학금 지급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평균적으로 해마다 10명에게 20만원씩 장학금을 지급한다. 장학금 지급 외에도 봄에는 장애인의 날 행사를 하고 여름에는 장애인 가족들과 야유회를 가고 가을에는 단풍구경을 가는데 큰 행사를 세 번 정도 하는 것 같다. 지난 해는 팔순, 칠순 잔치를 못 하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조촐하게 마련하기도 했다.


-장학금은 주로 누구에게 지급하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을 앞 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여유가 조금되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장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데 이번에도 한 명 정도 받게 된다. 후원해 주시는 분들하고 장학금 받을 학생을 선정 하는데 현재 7명 정도가 정해졌다.


-후원을 이끌어 내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후원 회원을 정해놓지는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장학금 지급을 해 온 것을 알고 있는 지인들에게 행사 무렵이 되면 연락을 한다. 돈이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사는 분들이 평소 쓰는 돈을 조금씩 아껴서 연말에 주시는 경우가 많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1만원, 2만원 모으면 행사를 할 수 있는 비용이 모인다. 기관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마을에서 내가 직접 다니면서 마을 분들 모시고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정말 좋은 것 같다.


장학금 수여식은 마을 잔치가 되어 버리는데 잔치국수도 마련하고 고기도 곁들여야 하니까 행사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든다. 음식이 부족하면 큰 일이기 때문에 남더라도 넉넉히 마련한다. 부인도 행사마다 힘든 내색 없이 도와주는데 정말 고맙다. 우리 마을에서 행사를 하면 이웃의 덕유마을, 금강마을에서도 찾아오신다. 15년 동안 이 곳에서 살아오고 있는데 이웃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

▲ 독거노인 팔순잔치 및 경로잔치

-어떻게 장애를 입게 되었나.
=약 17년 전에 고관절이 닳아져서 인조관절로 교체를 했는데 교체를 하면 어느 정도 관절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잘 먹으면서 안정을 취했어야 하는데 생활이 넉넉치 않다보니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달정도 목발을 짚고 생활하다 건설현장에 나가서 전기공사 일을 했다. 전기공사일이 생각보다 힘든데 무거운 파이프나 전선을 나르는 등 힘을 써야 하는 일이다. 그래도 생활을 해야하니까 3~4년 정도 무리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막내를 출산하고 병원에서 집으로 아기를 데리고 왔는데 오른쪽 다리가 막 떨리는 것이었다. 인천에 있는 병원에 갔는데 척수에 염증이 생겼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염증이 터져서 하반신 신경을 눌러버린 것이다. 수술도 못하고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한채 휠체어 장애인이 되었다. 인천에 있던 병원에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다니다 보니 병원비만 수 천만원 날리고 더 치료를 받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퇴원을 시켜버리더라.


그래서 2년 동안은 밖에도 나와보지도 못하고 안에만 있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마을에 쉼터를 하나 만들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쉼터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건물이 아니라서 2006년도에 이 공간을 여기 사장님께서 무료로 빌려주셨다. 그래서 공장에서 나오는 부업일을 해서 장애인 가족들이 반찬값이라도 벌고 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가운데 자랑하고 싶은 학생이 있다면.
=현재 작업장에서 부업을 하고 있는 농아인 부부의 자녀가 있는데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나와서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다.


-활동하시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 곳의 공간이 조금 더 넓고 장애인 화장실만 있다면 더 많은 장애인들이 나와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그 점이 아쉽다. 부업이라도 있으면 하면 좋은데 마을에 있는 장애인들이 생활비 나오는 것으로 술을 마시고 병으로 빨리 죽는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또한 장학회 사무실 공간이 없다보니 주변 분들에게 오시라는 말씀을 못 드린다. 고문님들도 계시지만 한 번 왔다 가시면 미안해서 못 오신다.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 말씀해 달라.
=장학회 작업장이 중 4동 쪽으로 옮겨져야 한다. 많은 돈을 벌려고 하면 부업이 시시하게 여겨지겠지만 장애인들이 소일거리라도 있어야 생활에 활력이 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 장학회 작업장이 이전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시면 좋을 것 같다.


작업장 공간이 확보가 되면 일거리는 많다. 샴푸 뚜껑 조립, 여기서 지금 하는 일도 사장님께서 계속 지원해 주실 것이다. 휠체어 장애인들도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소박하지만 함께 일하고 어려운 학생들도 꾸준히 도와주고 싶다.


정리=오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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